[독서록] 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

4/24/2025, 11:23:00 PM

이 책에 적힌 문장들 중에는, 그저 그 문장을 알게 된 것만으로도 나에게 큰 영향을 준 것들이 있다.

무언가 표현하고 싶지만 도저히 그것을 적절하게 설명할 단어를 못찾고선 장황하게 횡설수설하고 있는 나에게, “워워 진정해. 그건.. 이거야!” 하고 말해주었다.

이 책의 원제이자 책 속 ‘문화와 문명’ 강의의 교수인 엘리자베스 핀치는 화자에게만큼 나에게도 존경심이 들게 만들었는데,

화자의 존경심은 자신이 도달하지 못한 더 높은 관점을 제시하는 자에 대한 존경이라면, 나의 존경심은 내가 추구했으나 확신이 없었던 태도의 이상적인 실현에서 기인했다.

(당연히 내가 이미 높은 관점을 가졌다는 건 아니고, 오히려 몇 문장만으로도 비옥해질만큼 너무나 척박한 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특히 다음 문단은 책에서 여러번 나오는 ‘에픽테토스의 편람’의 한 구절인데 몸에 문신으로 새기고 싶을 정도이다.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어떤 일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다. 우리의 의견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있고, 우리의 충동, 욕망, 혐오 - 간단히 말해서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는 모든 것 - 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고, 우리의 소유나 평판이나 공적 직책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는 모든 것이 그렇다. 우리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일들을 하면 그 성격상 자유롭고 방해가 없고 막힘이 없다. 우리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일을 하면 약해지고 속박되고 방해받는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억하라, 본성상 속박하는 것이 자유를 준다거나 네 것이 아닌 것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면 좌절하고 비참해지고 화가 날 것이며 신과 사람 탓을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네 것만을 네 것이라고 생각하고 네 것이 아닌 것은 그냥 있는 그대로 네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도 너에게 강요하지 않고 아무도 너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고, 너는 아무도 탓하지 않고 아무도 비난하지 않고 내키지 않는 일을 단 하다고 하지 않을 것이며, 너는 적이 없고 아무도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다. 해치려 해도 너는 전혀 해를 입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은 읽은 그 순간부터 나는 심리적으로 너무나 안정되고 자유로워졌다.

우리 삶에서 자유와 행복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과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을 잘 구분하는데에 있다.


요 근래 나는 약간 번아웃같은 상태에 있었던 것 같다.

회사일이라는 건 내가 아무리 열정을 불태운다 하더라도 나의 의지대로만 흘러가지는 않으며, 아무리 용을 써도 결국 이 거대한 기어 박스의 한 부품이라는 걸 인정해야만 했고, 그러고 나니 일하기가 싫어졌다. ( 자아가 너무 비대해져버린 3년차 )

이런 심각한 사춘기를 겪던 중 위 구절을 보게 되었다.

그동안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을 깨달았고, 곧바로 비참함과 남탓이 사라졌다.

그리고 무엇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자.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 열정이 살아났다.

직장인 생활 3년이 지나서야 나를 지키며 제대로 협업하는 방법을 배우게 된 것 같다.


이 뿐만 아니라 삶의 여러 번뇌가 사라졌다.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현대인의 삶을 견디는 현명한 방법인 듯 하다.

또 이 문장도 상당히 인상 깊었다.


어른스러운 사람이라고 말할 때 (..) 모든 행동과 생각 안에 원칙이 실제로 박혀 있지는 않다 해도, 그 뒤 아주 가까운 곳에는 자리 잡고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 - 대부분의 사람의 경우 - 우리 원칙은 우리가 하는 일과 우리가 하는 말에 그저 스쳐 가는 정도의 영향을 줄 뿐이다.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접했다.

그 중 일부는 내 삶의 일부로 삼고 싶었다.

그런데 실제로 나의 행동과 생각에 엄격한 원칙으로 작용하는 것은 얼마나 있을까?

거의 대부분이 말 그대로 ‘스쳐 가는’ 정도의 영향을 주고 있을 것이다.

나는 전보다는 조금 더 똑똑해졌을지는 몰라도 그 깨달음을 실천하고 있는지는.. 그래. 잘 모르겠다.

나는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사상을 행동에 옮기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 쉬워서 거의 의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특히, sns에 떠돌던 어떤 멋진 생각에 따봉을 누르는 정도라면 더욱.


최근 나는 내가 종종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너무 거침없이 말할 때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 느낌은 너무나 부끄러운 느낌이었기 때문에 즉흥적으로 설익은 생각을 내뱉는 습관을 고치고 싶었다.

그런 다짐을 하고서도 자꾸만 튀어나오는 말을 삼키기가 어려울 때가 많았다.

이 책을 읽고서는 더 강력한 암시와 원칙을 정했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으면 아예 말을 하지 말자’

그리고 모든 말을 하기 전에 이 조건문을 거쳤다. ‘정리된 생각인가? yes or no’

이러한 원칙 하나하나를 그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그것을 나의 모든 행동과 생각의 원천으로 삼는 것은 정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이 차이를 인식하고 나서는, 원리원칙이 실제로 자신의 삶 안에 존재하는 ‘어른’스럽게 행동하기에 조금은 가까워졌다고 느꼈다. ( 여전히 실수하지만 )

하나씩 차근차근 모든 행동과 생각에 원칙이 존재하는 사람으로 나아가야겠다.


내가 이 책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엘리자베스 핀치가 역사를 대하는 태도가 상당히 나의 이상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어날 수도 있었지만 일어나지 않은 일을 일어난 일과 마찬가지로 늘 염두에 두어야 해요.

MBTI 가 S 인 사람이라면 공감하기 힘든 문장일 것이다.

  • 문. 우리가 견뎌야 하는 건 일어난 일들과 그것들의 결과인 현실 뿐인데 왜?

  • 답. 우연은 비켜 가지 않으니깐


책에 나오는 괴테의 삶에 대한 이야기부터 소개해보겠다.

괴테의 삶은 객관적으로 보았을때 굉장히 충만하고 흥미로워 보인다.

간단히 인터넷에서 그의 생애를 살펴보더라도 유복한 집안에서 풍요롭게 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그런 괴테는 임종 직전에 평생 겨우 15분만 행복했다고 말한다.(그의 나이 82세였다)

학생들은 이를 통해 죽음의 속성이나 지식인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때 한 학생이 재미있는 주장을 한다.

“괴테는 맞는 여자를 만난 적이 없었을 것 같아요”

이 유치하고 순수한 생각에서 핀치는 중요한 관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 밖에서도, 우리 자신의 격동적이고 안달 나는 삶에서도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려해야 해요


괴테가 불행한 삶을 살았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의 일대기를 뒤져보면서 온갖 불행을 유발하는 사건을 찾아보려 할 수 있다.

혹은 죽음을 앞둔 노인들은 보통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사실 그 원인이 사실 평생동안 좋은 여자를 만나지 못한 까닭이라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깊은 관계를 맺는 사람은 굉장히 소수이다. 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우연이다.

태어나면서 받는 유전적 특징, 매력적인 이성, 불타오르는 열정 등등 인생에서 우리를 현혹하는 수많은 강력한 우연들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사, 그것이 개인사든 지성사든 세계사든 간에 과거를 다룰때 그것이 선형적이라고 상상해서는 안된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우연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필연적인 인과의 결과물로만 역사를 바라보아서는 안된다.


어떤 인물이 형용사 세 개로 줄어들어 깔끔하게 정리되는게 보이면 그런 묘사는 늘 불신하세요

많은 위인들, 유명인들은 수식어를 가지고 있다.

책에서 나오는 중요한 인물은 ‘배교자 율리아누스’ 이다.

그에게 배교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이유는 그가 기독교가 로마를 잠식하던 흐름을 거스르려 했기 때문이다.

역사가 알려주다시피 그는 실패했고, 그 죄로 그는 이후 기독교가 유럽을 지배하는 기간 내내 흉악한 배교자로 설명되었다.


그러나 이후 여러 지식인들은 율리아누스를 다르게 인식하려 시도했다.

그는 도덕적이고 청렴한 군주였고, 무엇보다 계몽군주 였다.

그는 철학을 가까이 했고, 그런 그에게 기독교의 사상은 이성적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죽음을 바람직하게 생각” 하는 사상이 그랬다.

많은 지식인들이 율리아누스의 죽음을 ‘유럽사와 문명이 잘못된 길로 들어선 매우 불행한 순간’ 으로 파악한다.

그리스와 로마의 옛 신들은 빛과 기쁨의 신들이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 핀치에 따르면,

“하느님은 빛과 기쁨은 오직 사후에 자신의 사탕 과자 같은 천국에만 존재하며, 거기에 이르는 길은 슬픔, 죄책감, 공포로 가득하다고 선포했죠”


이처럼 율리아누스에 대한 평가와 묘사는 시대마다, 사람마다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역사를, (다시) 그것이 개인사든 지성사든 세계사든 간에 합리적인 설명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하려는 시도는 항상 실패한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시로 책에서는 ‘나라(국가)’ 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나라로 존재하려면 자기 역사를 잘못 알아야 한다’ - 에르네스트 르낭-

대표적인 나라가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줄리언 반스의 조국인 영국일탠데, 신사의 나라라는 이 수식어는 세계 식민사적 관점에서 볼때 상당한 위선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책 자체도 화자를 통해 이를 증명한다.

책의 화자는 평생 엘리자베스 핀치를 동경했으며, 핀치가 죽은 뒤에 그녀가 살아생전 남긴 모든 기록물을 유품으로 넘겨받았다.

그 모든 살아생전의 기억과, 모든 메모를 다 읽고서도 결국 화자는 엘리자베스 핀치가 대체 어떤 인물이었는지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었다.

겉보기에는 알 수 없는 수많은 우연이 긴 시간 속에 녹아져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율리아누스에 대한 이해 정도와 화자의 엘리자베스 핀치에 대한 이해 정도에는 별 차이가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역사는 '적자생존'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연계에서 살아남는 자는 가장 강한자도, 가장 현명한 자도 아닌 가장 적절한(마땅한) 자 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살아남았다고 해서 항상 더 마땅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 인류사에서 살아남는자들은 그저 더 총칼을 잘 다루는 권력자인 경우가 대다수이다.

현재의 과제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이 과제는 과거를 교정할 수 없을 때 더 긴요하다.

일어나지 않은 일을 늘 염두에 둬야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것이다.

다시 율리아누스로 돌아가보자.

우리의 관심사는 기독교 헤게모니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율리아누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만약, 율리아누스가 기독교를 몰아내는데 성공했다면?

모든 것을 배척하는 일신교가 아닌 여러 현지 신들을 포용하는 세상이였다면?

“인생에 기쁨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죽은 뒤의 어떤 터무니없는 디즈니화된 천국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인생이라는 지상의 짧은 이 시간동안 누리는 것이라는 믿음이 지적으로 승리했다고 상상해 보라”

“만일 근대 세계가 십자가의 그림자 속에서 산 게 아니라 다정한 여신의 망토 안에서 살았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하는 것은 커다란 문제이다”


율리아누스는 흉악한 배교자라는 이해를 교정하는 것으로 다른 차원의 관점이 탄생한다.

과거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교정하려는 시도가 더 소중한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단순히 선형적으로 역사를 인식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책에서 화자가 엘리자베스 핀치와 정치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이 있다.

화자는 엘리자베스 핀치에게 무정부주의자인지, 민주주의자인지, 페미니스트인지, 냉소주의자인지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묻는다.

이에 대해 엘리자베스 핀치는 그 모든 수식어를 부정하면서 종국에는 이렇게 답한다.

“닐은 나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하지만 나는 배의 침상 밑에 밀어 넣는 트렁크가 아니에요.”

한 사람은 그 사람이 살아온 역사로 이루어진다.

그 역사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묘사될 수 없다.


이것이 내가 대부분의 사안에 대해 가지는 태도이다.

너는 보수주의자인가? 진보주의자인가?

나는 엘리자베스 핀치의 말마따나 “나 자신에게 어떤 딱지를 붙일 만큼 허영심이 크지 않다”


어떤 갈등 속에서 너는 누구의 편인가?

글쎄. 양쪽 다 잘못한 것 같은데?

음 그건 양비론이야. 그건 너가 충분히 알지 못해서, 충분히 고민하지 않아서.

너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해?


세상은 항상 일어난 일을 토대로 사건을 깔끔하게 결론내려고 한다.

사실 이것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의 결과이고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나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이것이 없다면 ‘학문’ 이라는게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삶의 태도와 철학이라는 측면에서, 우연이라는 요소를 고려하는 것, 일어날 수도 있었던 일을 염두해두는 것에 항상 더 초점을 둔다.

우리는 결코 타인을, 타인의 시간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누군가를, 또는 나 자신을 ‘한마디로’ 규정하는 것을 항상 보류한다.

친구를 통하든, 뉴스를 통하든 누군가에 의해 서술되는 타인, 타인의 시간, 역사 는 항상 의심한다.

내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에 대한 이해를 교정하는 것이다.

모든 딱지를 떼어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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