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록]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님의 철학을 날씨를 바꾼다에서 인상 깊었던 내용

3/3/2025, 9:26:00 PM

지난 두 달 동안 이 책을 읽는 시간은 너무도 즐거웠다.

따뜻한 색감의 책 커버가 정말 마음에 들어서 계속 곁에 두고 싶었고, 책 속의 문장도 그만큼이나 따뜻해서 자꾸 열어보고 싶었다.

서늘한 공기 탓에 아침의 이불 속에 1분이라도 더 있으려는 마음처럼, 나는 올해의 추운 겨울 동안 이 책을 읽고 또 읽으며 보냈다.


이 책의 프롤로그에서 작가는 먼저 ‘우리를 지배하는 자'인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

날씨는 한 철학자의 생각에서부터 전쟁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고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진다.

우리가 속한 세계도 바로 날씨와 같다.

개개인의 사연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로 사정없이 운명을 뒤흔든다.

그런 강압적인 태도에 불만을 가지고 세계를 파악해 보려 하지만, 작가의 말마따나 ‘세계 안에 나 있는 심연들 때문에, 우리가 한눈에 볼 수 있는 세계의 모습은 없고 파편들 뿐이다.’


작가는 이 책이 ‘날씨를 선물로 주는 일기예보 스크립트’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일기예보는 날씨를 알려주는 것이 그치지 않고, 그런 날씨를 대하는 방법이나 주의 사항처럼 위로 같은 말을 함께 건넨다.

날씨의 지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각의 노력’ 을 통해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깨어진 세계의 파편들 속에 숨겨져 있던 의미들을 꺼내어 보여준다.

그것들을 내 손에 쥐고 곰곰이 사유하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나만의 날씨를 가지게 된다.

무지개를 만드는 분무기 같은 것을 내 손에 꼭 쥐여주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이 책은 그 부제처럼 나의 삶을 쓰다듬는 위안의 책이 되었다.


나는 이 책이 다루는 다양한 주제만큼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 중 ‘산책’ 에 대해서는 이미 다른 포스트로 다루기도 했다.

다른 주제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내용들을 추려 적어보려고 한다.


자기기만

‘소년의 나라’ 파트에서 작가는 우리의 문화, 역사, 말에 오랫동안 존재해 온 성차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런 것들은 일상생활 전반에 스며들어 고전, 명작, 전통과 같은 명분을 등에 업고 당당한 태도로 차별을 합리화한다.

인상 깊었던 것은 이런 차별에 대한 발견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발견한 작가의 태도였다.

내가 대학에 갓 입학했을 무렵 대학가에는 페미니즘이 싹트기 시작했고, 나는 그 주제에 깊이 빠지지 않았음에도 그 시기 20대에게 부여되는 숙제처럼 성평등에 대한 문제들을 고민해야 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여교사, 여기자와 같은 단어가 가진 차별성을 기반으로 그러한 단어를 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는데, 나는 이에 대해 언어의 사회성을 기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작가는 별다른 논거도 없이 명확한 문장으로 나의 이러한 생각을 바보처럼 느끼게 했다.

모든 가치의 전도 후 새로운 인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거냐? 대답은 단순하다. ‘그렇다’ 이다

분명하게 식별된 차별을 없애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 어떤 핑계도 논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자기기만, 영혼의 질병’ 파트에서 작가는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선택에서 기인하는 것인데도 자신은 그에 대해 수동적이라고 스스로에게 거짓 변명’하는 종류의 자기기만이라고 한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특히 사회에서 불의가 정의를 이기는 많은 상황에서 나타나는데, 다수의 사람들이 불의를 보고도 ‘어쩔 수 없었다’ 는 식으로 문제를 외면하지만, 그러한 사람들은 실제로 어쩔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자가 되기로 능동적으로 선택한 자’ 라는 것이다.

정의에 대한 헌신은 내가 자리한 어떤 사회적 직책에도 제한받지 않는다

내가 식별한 전 지구적인 자기기만은 환경 문제를 논할 때 나타난다.

환경 문제는 국가 차원에서, 아니 전 지구적 차원에서만 논할 수 있으며 개개인이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식이다.

실상은 누구나 환경을 위해 노력할 수 있으며, 노력들이 모여 작은 사회의, 한 국가의, 전 지구의 행동을 촉구할 수 있다.


‘쓰레기의 철학’ 파트에서 작가는 우리가 처한 쓰레기의 처분에 대한 문제를, 존재론을 기반으로 한 철학적 주제로 가져온다.

이데아를 기반으로 한 존재론으로는 쓰레기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쓰레기는 사물을 사물로 만들어주는 목적과 형상이 파괴된, 즉 사물성이 파괴된 것으로 어떠한 이데아도 모범으로 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의 존재론적 인식을 벗어난 대상인 쓰레기는 관념적인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물리적인 우리의 현실 세계에서도 적절한 답을 찾지 못한 채 그저 온 지구를 더럽히는 방식으로 버려지고 있다.


작가는 쓰레기로서 자신의 완성을 이루는 존재로 사물을 바라보자고 한다.

최근 보이는 접착성 상표 띠가 없는 플라스틱 페트병 같은 것들이 이러한 쓰레기의 존재론을 뒷받침한다.

분리수거가 쉬운 xxx, 자연 분해되는 xxx 와 같은 정체성이 사물 존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쓰레기를 어찌해야 할지 난처해야 하기보다는 쓰레기라는 완성 지점을 향하는 것에 대해 사유해야 한다.


인공지능

주제를 바꿔 이번에는 인공지능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작가는 인공지능에 대해 두 개의 파트에서 논하는데 결론의 방향성이 묘하게 달라서 흥미로웠다.


‘인공지능과 인공양심’ 파트에서는 판단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한다.

칸트는 판단력을 지식처럼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부의 능력’ 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칸트에 의하면 판단력은 두 가지 종류가 있는데, 보편적인 것들 하위로 개별적인 것들을 규정하는 능력인 규정적 판단력과 이와 반대로 개별적인 것에 대한 반성을 통해 규칙을 찾아내는 반성적 판단력이 있다.

작가는 ‘어쩌면 AI는 이런 판단력을 익힐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는 확실하게 AI 는 이런 판단이 가능하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작가가 생각하는 판단력의 위대함은 단순히 이런 식의 판단을 통해 지식을 얻는 데 있지 않다.

판사의 역할은 단순히 하나의 사건을 보고 그것이 어떤 법조문에 적용되어야 하는지 찾는 게 아니다.

판단력은 ‘이 사건에 대해 이 법을 적용해서 도덕적 가치를 달성해야 한다’는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이념에 비추어 이런 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은지 심판하고 비난하는 것이 판단력에 대해 우리가 기대해야 하는 것이다.

작가는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더 이상 인공지능이 아니라 인공양심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한다.


‘근대 이후, 하이브리드의 삶 또는 AI’ 파트에서 작가는 인공지능을 통해 근대적 사고의 핵심인 인간 주체를 부정하는 여러 철학적 주제를 논한다.

주체를 뜻하는 subject 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휘포케이메논’ 이라는 개념에서 기원했고, 이는 ‘근거로서 모든 것을 떠받쳐주는 자’ 라는 뜻이다.

근대는 이 주체를 ‘인간’ 으로 설정하고 스스로 모든 존재와 지식의 토대가 되었다. 인간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세계이며 인간 외의 모든 것은 대상이었다.

그러나 몇몇 기술 철학자들은 일찌감치 인간과 인간이 지배하는 대상인 기계 사이에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이성, 인간성, 자율성과 같은 건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미 chatGPT 를 필두로 ‘자기의식이 없는데도 주체’인 기계들이 공론장 안으로 들어와 있다.


작가는 인간 주체를 기반으로 한 근대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주체로서 자신의 지위를 잃어버릴까 걱정하고 경계하기보다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해야 한다.

도덕적 판단의 절대적 기준이 있는지, 도대체 무엇이 최고의 기준인지 우리는 결코 답할 수 없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관건은 우리가 아무리 인공지능을 무시하려 해도 AI는 계속해서 매력적인 무엇인가를 제시하며 인간을 유혹할 것이기 때문이다.


위 두 파트를 읽으면서 인공지능이 가질 수 없는 능력인 ‘판단력’ 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주체 자리를 인공지능과 나누자는 말이 혼란스러웠다.

더 이상 기계에 비해 인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이 없는데 ‘판단력’ 만큼은 결코 기계에게 내어주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인공지능과 인간의 미래에 대해 논할 때 내가 가장 인상 깊었고 또 동의하는 내용이 담긴 영상이 있다.

이 영상에서 김상욱 박사님은 ‘의미는 인간이 부여하는 것’ 이라고 말한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대단한 능력으로 인간의 영역을 침범하더라도 무엇이 가치 있는 것인지 정하고 그 가치를 존중하는 것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주제를 이렇게 정리하려고 한다.

인간은 더 이상 휘포케이메논으로서 주체(subject)는 아니지만 적어도 인간 스스로에 한해서는 여전히 주체(主體)이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편리하고 똑똑하다고 해도, 그리하여 이성의 테이블에 함께 앉아 있다고 해도, 인간의 운명 자체를 그에게 기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 유용함에 양심을 팔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

마지막으로 우리 사회에 대해 돌아보게 만든 주제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철학과 매스미디어’ 파트에서 작가는 진실을 전달한다는 사명을 가진 매스미디어와 진실한 앎(sophia)에 대한 사랑(philos) 인 철학을 비교한다.

환상의 짝꿍이어야 할 두 개념은 실제로는 경쟁적인 관계에 놓여있다.

이유는 매스미디어가 역설적이게도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별할 수 없게 하기 때문이다.

작가는 매스미디어 시대의 키워드로 호기심, 잡담, 애매함을 뽑는다.

호기심과 잡담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현대적 삶의 방식으로 현대의 사람들은 계속해서 새것을 만남으로써 생기는 동요와 흥분을 찾아다니며, 잡담을 통해 오랜 시간과 깊은 숙고를 요구하는 것들이 건성으로 다루어지고 단순화된다.

매스미디어는 이러한 현대적 요구와 특성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매스미디어는 이 정보들을 쏟아내는 것을 미덕으로 하지, 진실을 선별하는 일에는 인색하다.

이는 언론사로 대변되는 레거시 미디어나, 유튜브로 대표되는 뉴 미디어나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 결과 무엇이 진정한 이해에 속하고 무엇이 속하지 않는지, 무엇이 새롭게 성취된 것이고 무엇이 낡은 것인지 구별할 수 없게 되는 정황인 애매함이 등장한다.

대중인 우리는 미디어를 통해 정보를 취하고 진실에 다가가려 하지만, ‘진실로부터의 쇠락이 정보의 정체성’ 인 관계로 지독한 숨은그림찾기를 해야 하는 운명인 것이다.


나는 호기심, 잡담, 애매함이라는 키워드를 토대로 현대인이 처한 처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가 가진 호기심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함이 아니라 흥분을 얻기 위함이 근원적인 동기임을 직시해야 한다.

매스미디어를 통한 정보 습득이 주는 흥분감에 만족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한다.


정말 무서운 것은 잡담이라는 속성이다.

세상에는 매일같이 수많은 뉴스가 쏟아진다. 그 속에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철학자의 위협적인 비판도 있으나, 바로 옆자리에는 어느 예능 프로의 시시콜콜한 논란거리도 있다.

이런 것들이 그저 수없이 배출되고 있다. ‘모든 것들이 건성으로 다루어지고 단순화된다.’

이것은 무엇이 헤드라인이냐 또는 어떤 주제에 얼마나 많은 지면을 할애할 것이냐 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미디어를 통해 새로운 것이 전달되면, 그것이 아무리 치명적인 것이더라도 우리 세계의 일부, 안전하게 유지되고 관리되는 문화의 한 부분으로 여겨진다.

흥미를 끌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많은 것들처럼, 미처 이해되기도 전에 낡은 것으로 버려지고 잊혀지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매스미디어를 통해야지만 진실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는 것이 대중인 우리의 처지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호기심과 잡담으로 생겨난 ‘애매함’ 을 애매한 상태로 두지 않으려는 노력이다.

현실에서는 무엇이 애매한지를 식별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단순화된 잡담으로 정보를 습득하기 때문이다.

건성으로 다루고 진실에 도달했다고 착각하지 않아야 한다.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스스로 생각해야 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이 시대의 애매함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비판적 태도를 항상 유지해야 한다.


살짝 주제를 틀어 정치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매스미디어는 호기심과 잡담 이라는 현대적 삶과 밀접하게 결합했다. 그리고 정치는 이러한 매스미디어와 밀접하게 결합했다.

‘정치인들은 자신의 방패가 되어줄 정보를 계속 생산해 낼 수가 있다.’

이 지경이 되면 정보는 무용한 것이 되며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정보는 전능한 것이 된다.

‘어떤 정보도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히틀러를 무찌르기에는 충분치 않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자.

하나의 사안을 두고 두 쪽으로 쪼개져 완전히 상반된 정보가 쏟아지지만, 그 정보 자체는 무용하다.

정보의 홍수가 대중을 휩쓸고 지나가면 그 자리에 남는 건 오직 이런 식의 잡담이다.

“내 편 아니면 적”


그런데 정치란 원래 이런 식으로 서로를 죽고 죽여야지만 나아갈 수 있는 것일까?

정치란 것이 본질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성질을 가지고 있냐는 것이다.


‘서유기와 혹성탈출의 정치’ 파트에서 작가는 서유기의 손오공과 혹성탈출의 시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혹성탈출에는 혼란과 투쟁 속에 들어간 자들을 화해와 조화 속으로 이끌어주는 통일의 이념이 없다’

결론적으로 인간은 지구상에서 멸종하며 원숭이들만이 남는다.

‘손오공은 석가여래에게 벌을 받고 삼장을 도와 수행을 마친 뒤, 마침내 죄를 씻고 부처가 된다’

서유기의 마지막은 불교 사상의 형태로 조화와 통일의 이념을 제시한다.

‘더 이상 죄지음도 불만도 없는,, 통일된 하나의 세상 속에서 자신에게 적합한 위치를 얻는,,’

두 말썽꾸러기 원숭이가 불러온 갈등은 전혀 다른 결말로 도달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의심의 여지 없이 혹성탈출 종의 전쟁 이다.

‘권력가와 그가 만든 임의 규칙, 위반에 대한 형별 그리고 보복’ 만이 존재한다.


‘유머’ 파트에서 작가는 경직성의 한심함이 드러날 때 웃음이 터진다고 했다.

언제 회색빛의 엄격한 도덕과 법이 단지 인간을 사냥하기 위해서 자신의 엄밀함을 뽐낼지 모른다

오로지 서로를 죽이기 위한 이념을 가지고 법조문을 달달 읽어대는 모습을, 양보와 화해 없이 서로에게 부여된 권한을 힘자랑하듯 휘두르는 모습을 우리는 실시간 생중계로 보고 있다.

이 나라의 정치는 유머를 잃은 것 같다.

그러한 정치는 그래서 코미디다.


갈등이 상승된 화해에 가닿는 정치는 분명 존재한다.

이런 전망이 그저 관념적일 뿐인 게 아니라고, 오히려 정치만이 이를 현실로 만들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한다.

오늘날 국제사회 어디를 돌아보건, 누구나 그 빛 속으로 걸어 들어가 동참하고 싶게 하는 이념을 제시하는 정치가 없다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지역, 나이, 성별로 온 국민을 갈라놓고 어느 편에 설지 고르라는 식의 정치가 아닌, 멋진 미래를 그리고 그곳에 함께 가자고 하는 정치.

도저히 그 여정을 함께 하지 않고는 설렘을 주체할 수가 없는 그런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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