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각을 정리하는 노트앱 제작기(1)

나의 생각을 잘 정리할 수 있는 노트앱을 직접 만들기로 한 이유

1/14/2025, 12:25:00 AM

​ 나는 종이 노트를 선호하는 편이다. 강의를 들을 땐 항상 펜과 종이를 챙기는 편이고, 출장을 가서도 핸드폰 노트보다는 종이 노트에 주요 내용들을 적어둔다. 회사에서도 종이 노트를 붙잡고 골똘히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데, 개발자가 컴퓨터를 앞에 두고 종이와 씨름하고 있으니 퍽 신기한 광경인지 다른 동료들이 종종 이를 기억하고선 화두에 올리기도 한다.

내가 종이 노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내가 생각의 구조화를 그리 잘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좋은 아이디어가 생각나거나 인상 깊은 문장을 보았을 때, 그것으로부터 빠르게 온갖 생각들이 발산해서 온 머릿속이 쑥대밭이 되는 경험을 상당히 자주 한다. 그 생각들은 하나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분명히 뭔가 연결점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그게 뭔지는 명확하게 잡히지 않아 답답한 경우가 많다.

이럴 때 보통의 컴퓨터 노트앱들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컴퓨터에서 타이핑을 통한 노트란 보통 위에서 아래 로 적게 되어있다(이 글처럼). 이러한 형식은 위에서 아래로 전개되는 논리를 전제로 하는데, 생각이 발산하는 시점에는 이러한 체계적인 논리적 관계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나는 상당한 악필임에도 불구하고 펜을 들고서는 어디에나 글을 적을 수 있는 놀라운 도구인 종이를 찾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종이 노트를 쓰면서 다소 아쉬운 경험을 하게 되었다. 저번 독서록의 주제였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는 나에게 대단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이 책을 최대한 완독해서 소화하고 싶었던 나는 발산해 있던 수많은 생각들을 모두 기록하고 정리하기 위해 여느 때와 같이 종이(호주에서 사 온 매우 마음에 드는 노트) 앞에 앉았다. 그리고 종이는 대규모로 확산하는 생각과 싸우기에는 너무 원시적이었다.


먼저 종이는 작다. 보통 크기인 노트의 양면을 모두 활용했지만 여전히 좁아서 조그마한 여백에 글자들을 욱여넣어야 했다.

한번 적으면 그 위치에 고정된다는 것도 아쉽다. 발산하는 생각들을 적을 땐 발산의 방향을 추적할 수 있게 나름의 클러스터링을 해서 적는 편인데, 생각할 거리가 많은 영역은 금방 좁아진다. 적다 보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유사점이 보이기도 하는데 이때도 글자를 옮길 수 없어서 화살표나 선으로 표시해 두는 수밖에 없다.

또 손 필기는 느려서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를 못한다. 이건 분명 내가 악필인 원인 중 하나이다. 손으로 생각을 적는 와중에도 새로운 생각이 떠오르는데 손 필기를 하다가 그 생각이 휘발되어서 다시 떠올리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아쉬운 것은 종이에 적은 것을 다시 컴퓨터로 정리하는 그 경험 자체가 불쾌하다는 것이다. 종이 노트를 쓰는 것은 발산한 생각을 적어두기 위함이고 그 생각을 잊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추후에 잘 정리하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논리적으로 잘 작성된 ‘정리된 생각’ 은 종이라는 물리적 형태로 존재하는 것보다 컴퓨터에 데이터로 존재할 때 더 활용도가 높다. 무엇보다 악필인 내가 손으로 적은 글은 더욱 가치가 없다.. 따라서 결국 생각을 정리하는 작업은 다시 컴퓨터 앞에서 하게 되는데, 종이와 모니터를 번갈아 가며 보고 타이핑하는 것은 신체적으로도 피곤할 뿐만 아니라 집중력도 흩트린다.


그래서 나는 발산하는 생각으로부터 정리된 생각에 이르는 그 과정에 사용할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발산하는 생각은 종이보다 더 자유롭게 발산할 수 있어야 하고, 발산하는 생각으로부터 정리된 생각을 도출하는 과정은 더 편리해야 한다. 이것을 내가 만들 도구의 핵심 가치로 두고 앱을 기획하니 주요 기능도 자연스럽게 도출되었다.
  1. 어떤 영역이라도 자유롭게 텍스트를 적을 수 있는 무한 캔버스가 필요하다
  2. 텍스트의 위치를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3. 자유롭게 적은 텍스트를 보면서 정리된 노트를 작성할 수 있어야 한다

처음에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노트앱을 여러 개 찾아보고 실제로 써보기도 했는데 결론적으로 완전히 만족스러운 앱은 찾지 못했다. 보통 이러한 무한 캔버스 개념을 가진 앱들은 너무 기능이 많아 무겁거나 잔 랙이 있어 계속 신경을 건드렸고, UI도 복잡해서 빠르게 생각을 발산시키기에 적합하지 않았다.
애초에 대부분의 노트앱들은 노트를 쓰는 근본적인 이유(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즉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 자체에 포커스를 맞추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생각의 단계'는 다음과 같다. ​
  1. 발산 : 여러 생각들이 동시에 자극받는다
  2. 추출 : 여러 생각들 사이에 새로운 의미가 추출된다
  3. 구조화 : 새로운 의미가 기존 생각들과 함께 구조화된다

대부분의 노트앱은 구조화 단계에 거의 올인하는데, 그마저도 내 뇌에서의 구조화가 아니다. rich-text editor를 탑재하여 글자 스타일을 변화무쌍하게 바꾸고 문단을 나눈다. 정리된 노트들을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고 빠르게 검색하게 해준다. 세컨드 브레인이 유행한 지도 오래되었다. 유용한 생각들을 내 뇌가 아닌 별도의 저장소에 저장하는 것은 분명 라이프 핵 이긴 하지만 인생의 중요한 순간에 내 뇌에서 구조화되지 않은 정보는 무쓸모하다. 깊게 사유하여 나의 철학이 되지 않는 모든 철학은 위험하기까지 하다.
나의 앱은 이런 식으로 활용하도록 설계하였다.
  1. 자유 노트에 생각을 마구 발산시킨다.
  2. 자유 노트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아이디어를 캐치한다.
  3. 자유 노트를 옆에 두고 정리 노트에 생각을 정리한다.

이는 ‘생각의 단계’를 도와주는 것에만 집중한 결과이다.

이 글도 나의 노트앱을 통해 작성되고 있다. 사용해 보니 확실히 편리하다. 조금 더 써보면서 이 앱에 담긴 철학을 더 견고히 하고 추가 기능을 생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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