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생각을 정리하는 노트앱 제작기(2)
산책할 때의 생각과 종이 위로 적어 내려가는 생각의 차이
1/20/2025, 11:55:00 PM
최근 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본 글에서는 이 책의 3. 위안의 말 > 산책 파트를 읽다가 떠오른 단상을 적어보려 한다.
나의 첫 대학 전공은 조경학 이었다.
왜 ‘첫’ 전공인지, 왜 ‘조경학’ 인지 등 이 짧은 문장에 담긴 사연을 이야기하자면 복잡하지만, 일단 지금 이 글에서 설명이 필요한 사연은 이렇다.
나는 대학에 가기까지의 20년의 세월동안 조경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본적은 한번도 없었다.
처음 전공 수업을 듣는 1년 동안에도 조경학개론 수업을 듣지 못했으니 ‘도대체 내가 지금 공부하는 조경 이라는 건 대채 뭐를 다루는 학문인가’ 라는 의문은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 개론 수업은 군대를 전역한 후에야 들을 수 있었다 )
그나마 나의 삶에서 ‘조경이 뭔가 중요한것 같다’ 라는 느낌을 받는 순간은 산책을 할 때 뿐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나에게 ‘산책’ 은 단순한 행위 이상의 의미를 지닌 탐구의 대상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산책에 대한 탐구에 불을 지핀 것은 이석원의 산문집 보통의 존재 에 나오는 ‘산책’ 파트이다.
나는 언니네이발관의 오랜 팬이며 특히 5집 ‘가장 보통의 존재’는 내 인생의 no.1 엘범이기도 하다.
‘보통의 존재’라는 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언젠가 꼭 읽어야지 하고 있던 것을 자대의 진중문고에서 발견하여 읽게 되었다.
이석원은 산책이 각자에게 다양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누군가에게는 산책이 삶의 전부이기도 하다. 산책이 거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도 있다는게 마음에 들었다.
산책길 마다의 성격과 특징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산책자는 산책길로부터 기운을 얻기도 뺏기기도 하며, 또 다른 산책자에게는 관찰의 대상, 즉 산책길의 일부가 된다. 길의 성격을 논하는 것, 그야말로 조경이다.
특히 좋아했던 부분은 언덕길에 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언덕길을 오를때 느껴지는 약간의 버거움, 그로부터 오는 충만감, 다 올랐을때의 가뿐함, 그리고 다시 내리막. 이 짧은 구절을 보면서 길 위의 걸음을 이렇게까지 음미할 수 있다는 것이 왠지모르게 벅차올랐다.
내가 조경학 전공을 쉬이 놓지않고 열정과 미련을 가지게 된 것에는 이 짧은 책의 한 파트가 분명 큰 역할을 했다.
그후 또 어떤 복잡한 사연으로 인해 ‘조경학’과는 이별하게 되었고, 산책에 대한 탐구도 진전이 없었다.
그러다 오늘 간만에 또 책에서 산책에 대해 사유한 글을 만나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산책과 ‘생각’ 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지금 만들고 있는 (내가 생각앱 이라고 부르는) 노트앱의 기획과 연관지어 생각해볼 거리가 있었다.
저자는 산책할 때 발생하는 생각 과 책상에 앉아 종이 위에 적는 생각의 구조적인 차이를 말한다.
산책할 때의 생각은 두서없이 폭죽처럼 산발하면서 유쾌하고 흥분되며 생기있는 것이다. “원래 산책을 할 때는 여러 가지의 번쩍이는 발상이 번개처럼 동시에 떠올라 한꺼번에 마구 밀려오는 것이 보통이니까” 라는 말은 생각의 소용돌이에 쉽게 휩싸이는 나에게 다소 위안이 되기도 했다. 나는 내가 보통 이라는 걸 깨달을 때마다 조금씩 더 자유로워지는 기분이 든다.
반면 책상에 앉아 종이 위로 적어 내려가는 생각은 규칙에 얽매여있으며 일그러지고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러면서 ‘박식한 학자의 책에서는 억누르고 또 억눌린 어떤 것이 느껴진다: 어디에선가 ‘전문가’의 티를 내는 것이다’ 라는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박식한 학자에게조차도 어색한 티가 나지 않도록 본인의 생각을 적어내려가는 것은 어려운 것인가 보다.
나의 노트앱은 생각을 정리하는 행위에 대한 다음과 같은 시각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 생각이 마구마구 발산한다.
- 발산한 생각들에서 중요한 무언가를 찾아낸다.
- 그 중요한 무언가를 논리적으로 수렴시킨다.
나는 이 노트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보고 있는데, 이때 느껴지는 감상도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생각의 구조적인 차이와 일맥상통한다.
무한 노트에 생각을 마구마구 발산하면서 글감을 채워넣는 시간은 즐겁다. 산책하면서 이런저런 흥미로운 생각에 휩싸여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걷는 것과 비슷하다.
반면 정리 노트에 논리를 전개해나가는 시간은 약간 고통스럽다. 내 머릿속에서는 강하게 연결된 생각이지만 글로는 부드럽게 이어지지가 않아 답답한 경우가 많다. 생각을 문장이라는 규칙에 맞게 표현하는 것, 그래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명쾌하게 정리된 생각인 ‘척’ 하는 것은 항상 어렵다.
한 철학가의 산책에 대한 예찬으로부터 발산하는 생각의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고, 정리된 생각에 존재하는 필연적인 어색함을 인지하게 되었다.
인생의 여러 순간에 산책이 중요하게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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